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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간 이식 기증자/공여자 조직 검사 이후 이식 실패/불가 판정 후 10년

by Planzee 2022.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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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에 있어서 간의 기능이 정말로 중요한 것임을 이때는 몰랐다.

어머니의 간경화 / 윌슨병이라는 병명으로 인해서 간의 건강 상태가 매우 나빠졌기 때문에 이식이 답이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간 이식에 대해서는 최고 수준이라는 이 박사님이 계신 서울아산병원에서 진행했으며 해당 날짜는 2022년 기준 11년 전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재랑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이식 실패/불가라는 결과를 통해 겪게 되는 슬픔이나 비극(?)을 먼저 경험한 자로서 공유하고 위로하는 마음에서 작성하게 되었다.

 

아무나 공여가 불가능하다

간 이식을 받기 위해서는 공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나 공여를 할 수 없다.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설문에 응해야 하고 심리적인 요소라든지 체크를 많이 한다. 옛날에는 큰돈을 주고 기증자를 구해서 하는 일도 있었다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인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지인이고 선한 마음으로라도 마음대로 해 줄 수 없다.

 

 실제로 나의 지인 중에 먼저 전화와서 자기가 할 수 있으면 해 주고 싶다고 아주 고맙게도 연락이 왔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친한 지인이라도 그 지인의 부모님과 가족도 다 아는 사이인데 섣불리 허락할 수도 없거니와 이후 부작용이나 삶의 불편함 등의 불확실성, 몸에 남게 되는 커다란 수술자국, 그리고 법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마음만 받기로 했다. 그래서 간 기증자의 간을 기다려야 되는데 순번은 매우 밀려 있기 때문에 이것 또한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간을 이식 받기 위해서는 가족만이 답이다.

 

조직검사

 조직검사 비용은 그때 당시 거의 200만 원 정도 되었다. 이후 나의 황달수치라든지 이런 검사 결과에 따른 판단을 전화로 안내받는 데에도 30만 원 정도가 청구되었다. 이것 외에도 어머니의 검사를 위해서도 입원하는 데에 6인실이 얼마 없는 데다 얼마 없기 때문에 만실이라 2인실로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 뭐 그렇게 해서 뜻하지 않은 추가 지출까지 전부 합하면 병원비가 매우 세게 나온다.

 3차 진료기관이라 전국에서 몰려들기 때문에 예약조차 매우 힘들고, 대기해야 되는 시간도 길며, 각 검사마다의 스케쥴도 가득가득하기 때문에 1가지 검사를 받고 그다음 검사를 바로 예약한다고 해도 꽤 긴 시간의 텀이 필요했으므로 입원 기간은 그때 당시 2박 3일로 기억한다.

 

본론으로 넘어와서 공여자 조직검사의 큰 맥만 이야기하자면 CT 촬영을 위해 조영제를 투입, 사람에 따라 메스껍고 역한 느낌의 강도가 다르다고 하는데 나 역시 조금의 메스꺼움을 느꼈다. 조영제를 투입하면 혈관에 따라 투입되는 것들이 온몸에 느껴지는데 남자의 경우에는 고환에까지 그 뜨끈한 느낌의 액이 지나가는 걸 느낄 정도다.

CT를 찍고 뭐 이런 것들은 그냥 아무것도 아니고 피검사 이런 것들도 아무것도 아니다.

 

조영제를 투입한 후에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조영제 투입 후 물을 많이 마셔서 소변으로 빠져나가게 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 2L를 먹어야 한다고 본 것 같다.

그래서 물통을 달고 살았다.

 

간 조직을 떼어내는 검사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겪는 느낌이다.

겉에서 집개 같은 걸 몸 속으로 뚫고 간 조직을 떼어 내야 하는 것인 만큼 옆구리 마취를 진행한다.

이후 얇고 긴 기구를 넣어서 간까지 밀고 들어가는데 장기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느낌이 매우 이상했다. 사이사이로 어쨌든 들어갔으면 간에 도달해서 기구로 딸깍 하는데 그 딸깍이 조직을 탁 잡아 떼어 내는 느낌이었다. 두 번 정도 했는데 그 한 번 딸깍 할 때마다 명치를 세게 맞은 것처럼 '헙' 하고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취가 살갖 겉에 구멍 뚫을 때의 마취는 되지만 속의 장기까지 마취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안에서의 고통은 느껴진다.

 

그렇게 검사가 완료되면 병원침대에 실려 있는 채로 나오게 되고 커다란 검사는 끝났다.

병실입원_주사
너무_거슬렸던_투입구

그리고 주삿바늘 꽂고 있는 게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일인지 깨달았던.

계속 이물감이 느껴지고 빨리 떼어 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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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여 실패 판정

간 이식에 대한 자료를 많이 조사했었지만 공여 실패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실패했고 공여 불가 판정을 받았다. 

  1. 간의 크기와 모양이 좋지 않다.
  2. 황달 수치가 높다.

위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공여가 불가능했다.

간의 모양이 정상적이라면 우리가 본 것처럼 비대칭으로 생겨서 한쪽으로 큰 부분을 절개해 이식해 주면 점차 회복이 되어서 절개 이전만큼 대부분 회복된다는 것인데 나의 경우에는 반반의 모양이었다. 좌우가 거진 대칭에 가까워 어느 한쪽으로도 필요한 만큼의 절개가 어려웠고, 더불어 간 크기도 작아서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리고 황달 수치가 높아서 재검을 받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집 근처 병원에서도 재검을 받은 바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쨌든 높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변함이 없었고,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나도 간이 좋지는 않았다.

 

공여 실패 이후

공여의 실패 판정을 받은 이후 지옥의 10년이 시작되었다.

혹시 이 글을 누가 읽을지는 모르지만 그 읽는 분에게 희망이 되는 글이었으면 좋겠지만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매우 힘들고도 지옥 같았던 나의 이야기다. 

 

사람이 희망이 사라지면 절망밖에 남지 않는다.

이식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엄마와 할머니에게 이야기하자 엄마는 절망에 빠졌고, 할머니는 왜 너는 안 맞느냐며 나를 나무랐다. 아버지는 나이도 있고 혈압도 있는 사람이기에 애초에 나밖에 희망이 없었는데 안 된다고 하자 원망이 나에게 돌아왔다. 물론 나는 철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때 나름의 상처도 받고 마음이 좀 닫히는 상태가 되었다.

 

어쨌든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낙망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지만 실제로 제일 가까운 사람이 그 한순간에 몇 마디 말을 듣고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괴롭기 그지없다.

더불어서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그동안 싸워 왔던 병마에게 손쉽게 무너진다.

이후 어머니의 병세는 아주 급격하게 악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는 뇌병변 장애 1급에 이르게 되었고 그 과정이 정말 지옥이었다.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도 잦았고, 24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계속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내가 2교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엄마 봐야 했다. 앉혀 주면 일으켜 달라고 하고 도저히 가만히 못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지옥. 공원이나 마트를 계속 돌아다녔기 때문에 동네 사람은 물론이고 주변 상인이나 종업원까지 다 알 정도가 되었다.

때론 할머니랑 같이 나갔다가 뒤로 넘어지면서 할머니랑 엄마는 못 일어서서 도움을 받아 일어선 적도 있고, 때마침 정신적으로 연약할 때 보이스피싱까지 당해서 금전적으로도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더 이상의 집에서의 요양이 불가능해서 요양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소리를 계속 지르는 바람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병실도 아닌 간호사 대기실 같은 곳에서 지낸 적도 있고, 3일 만에 쫓겨난 요양병원도 있었으며 상태를 보고 입원 거부를 당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면서 병세는 여전히 악화되었고, 결국 정착한 곳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는 바람에 또 옮겨 가야 했다.

소변줄을 달고 살았는데 무의식적인 것인지 엄마가 계속 빼는 바람에 시술하러 큰 병원에 또 가서 큰 시술비를 내고 다시 삽관해야 했던 일도 다반사였고, 중간에 병세의 심한 악화는 멈추고 유지되는 듯한 채로 서서히 나빠져서 나중에는 말도 거의 할 수 없고 정신연령은 어린 아이 같은 수준이 되었으며 누워만 있고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욕창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다.

그렇게 점점 나빠지는 채로 입원한 세월만 10년을 채웠고 중간중간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도 넘쳐났으나 코로나의 발병으로 최근 1~2년 동안은 면회조차 힘들었고, 그 때문인지 제대로 된 관리와 보호가 어려워진 틈에 욕창이 심해져서 결국 4기 욕창 합병증까지 겹치는 바람에 엄마는 이 세상의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큰 환자가 있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어지간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이 아니면 맞는 말이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랑도 연동되는 것인데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되는 것처럼 가정에 어려움이 있으면 항상 우울하고 어렵고 돈 때문에 서로 아쉽고 나가서도 이런 기분과 생각과 기운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비경제적인 부분뿐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꽤 많은 부담이 자리잡기 때문에 남들은 저축하고 투자하고 점점 쌓아 가는데 나만 계속 허우적대고 제자리걸음하는 것에도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준비하던 일도 포기하고 어쨌든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에 변변한 직장에 취직을 못했고, 스타트를 잘못 끊는 바람에 이직과 같은 일은 더욱 생각도 힘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찾아온다. 나는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가정을 이루었고, 내 생명보다도 귀한 자녀를 두었다.

여전히 돈 때문에 허덕이고 있고 인생에서 엄마와 추억의 상당수가 고통과 함께여서 아쉬웠지만 그 끝은 왔다.

가족의 고통, 상처, 아픔을 겪는 분들에게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는 없겠지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고통을 함께해 온 자로서 나의 경험이, 기증을 못한 죄책감으로 사로잡혀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란다.

가족을 위해 열심을 다하는 것도 맞지만 나의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나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나를 조금이라도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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